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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기

from 일상/일기 2008. 3. 4. 03:23
1.

오랜만에 학교를 갔다.

사실 꼭 갈 필요는 없는데, 연구는 연구실에서 하는 거라고 사람들이 하도 그래서 연구실 가서 하기로 했다.

집에 있어서 안 하는 거는 학교 가서도 안 하고 학교서 할 거는 집에서도 하는데...

오랜만에 갔더니 컴터가 작살나 있었다.

누구 탓할 일도 아니고 오래 안 간 내 잘못이니... 연구실 오빠가 고쳐주긴 했는데 솔직히 맘은 상했다.

아니 그보다, 내 컴퓨터가 성능이 좋은 것도 아닌데 거기서 뭘 뜯어가야 하는 우리 연구실 현실이 좀 불쌍하다.



2.

연구실 가면 심적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내뿜는 감정을 플러스든 마이너스든 필요 이상으로 잘 감지하는 편이고

그 와중에 마이너스를 내뿜는 사람이 있으면 쉽게 피곤해진다.

수더분하게 무시하고 살면 좋은데 그렇게 잘 되지가 않지. 아니, 실은 굉장히 의식하는 편이다. (그래 나 소심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선후관계가 없을 것도 같지만 나의 반응은 항상 뒤다. 나는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친절한 편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막 앵기는 편이라... 차이는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 사람을 유별나게 더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기보다는,

이 사람은 나에게 호감이 있으니까 이 정도 까지는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타진이 꽤 여러번 있은 뒤라서다.

나는 사람을 잘 못 사귀는 편이다. 내가 말을 잘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이해를 잘 못하지만.

낯을 안 가려서 먼저 인사는 잘 건네고 말도 잘 나누지만

첫 인사 이후에 두번째 인사에는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잘 모르는 편이다.

그건 어릴 적의 트라우마 탓도 있고.

나랑 친해지고 싶으면 그냥 친한 척을 많이 하면 된다. 나는 그러면 그 사람을 좋아한다. 친한가 보다 하고 착각도 한다.

하지만 싫어하면 그냥 나를 피해 주시라. 나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피할 수 없으면? 견뎌야 하나? 견딜 수가 없으면?

앞으로 긴 인생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히 수없이 많이 있을 텐데 그 때마다 이렇게 괴로워서야 어쩌나.

확 때려치고 다시 집에 쳐박혀 있고 싶지만 연구실 안 가서 생기는 스트레스 < 가서 생기는 스트레스인데 아직은 미묘한 레벨이므로 두고보기로.



3.

결국 오늘 하루는 카페인에 의존해서 보냈다.

커피 한 잔에 내가 해내는 일의 양이 꽤 많이 늘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오늘 해치운 걸 생각해보니 거의 일주일치 일이다.

하루에 한 가지쯤 하고 나면 지쳐서 늘어질 일을 다섯 개쯤 한 듯 싶다.

우울하다. 커피를 마신다고 내가 슈퍼 우먼이 되는 게 아니다.

그냥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우둔하고 멍청하고 둔하며 게으른 인간이라, 보통 사람의 1/5 밖에 못 하는 거다.



4.

시사회 갔다 왔다. 오자마자 감상문 쓰고 일찍 잤으면 좋았을 걸, 벌써 세 시인데 이딴 거나 쓰고 있다.

오늘도 늦게 자는 구나 하는 기분에 우울 + 오늘의 일이 내일로 미뤄져서 우울.

이럴 때는 나를 파묻어버리고 싶다.

아, 저녁으로 먹은 소렌토는 갈 때마다 화가 나는 식당이다. 덕분에 우울 * 1.414....

더럽게 비싼데 정말 맛이 없다.



5.

연구실에서는 월급도 안 주는데 (그거야 출근을 안하니깐 그렇다 치고) 아버지가 용돈을 안 주신다.

내 생각에 자동이체 끝났는데 말을 안 하니 모르시는 것 같다. 일부러 안 주실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용돈 주세요, 하자니 이젠 진짜 우울하다. 내 나이가 몇 개인데...

그래서 그냥 있는 돈 까먹으며 지내고 있다. 해야하는 (그것도 돈은 안나오는) 일만 있는 백수의 기분이다. 최악.

돈도 없는데, 2년 동안 옷을 별로 안 샀더니 입을 게 없다.

구두도 적어도 두 켤레에서 로테이션 하고 싶은 기분인데...

화장품도 간당간당하고..

적은 수입으로 사는 법은 아는데 수입이 전혀 없을 때의 사는 방법은 모르겠다.

아끼는 건 좋은데 그래도 돈이 있을 때 옷을 사는 게 나은 것 같다.

있을 때 안 사면 돈이 없을 땐 못 사니 아예 옷이 없어 진짜 추레하다.



6.

블로거 컨퍼런스 날에 교수님 따님이 결혼을 하신다고 한다.

난 세워둔 계획이 무너지는 게 너무 싫다.

세상이 맘먹은 대로 안 된다고 땡깡부리는 것 같아 유치하군.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



7.

모자란 것 없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마음에 뚫린 시커먼 구멍은 메울 방법이 없나보다.

이만큼 사랑받고 있는데 안 되면 영원히 안 되는 거겠지.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하여 덮어놓아도, 살짝만 건드리면 다시 갈라져 검은 것을 펑펑 뱉어낸다.




8.

우울하다는 글 정말 쓰기 싫고 남들에게도 불쾌한 글이고 내가 다시 봐도 화만 날 거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견딜 수가 없다.

외로운 것도, 힘든 것도, 절망적인 것도 아니다. 그냥 괴롭다. 마음에 병이 났나보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하루를 보내겠지.

나의 나를 기만하는 능력에 치가 떨린다. 자기 혐오 중.




그래도 쓰고 나니 한결 낫군. 악몽을 꾸느니 추한 일기를 보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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