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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원 14 2008.03.01

낙원

from 일상/일기 2008. 3. 1. 00:21

 어렸을 때, 나는 책을 꽤나 좋아하는 아이였다. 길을 가다가도 책을 보면 눈을 떼지 못했고, 친척집에 가서도 친척들과 놀기보다는 그 집에 있는 미처 읽지 못한 책을 빼들고 앉는 바람에 한 살 아래의 친척동생에게 원성을 듣기도 했었다. 집 근처에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정도의 가까운 도서관은 없었다. 어른이 된 지금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야 3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는 도서관 - 이건 당시에는 걸어서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 어린 아이의 총총걸음으로 40분이 넘게 걸리는 또다른 도서관. 그 사이에 우리 집이 있었고 엄마가 차로 데려다 주시지 않으면 도서관에는 자주 가기 힘들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원망스러운 IMF가 터지기 전에는 우리 가족도 매주 밖에 나가 외식을 했다. 별로 넉넉한 집에서 자라지 못하신 부모님이 데려가는 음식점은 늘상 돼지갈비였다. 돼지갈비를 먹고 나면 그 다음은 서점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책을 골라 손에 들고 그 다음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동안을 주저 앉아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으며 놀았다. 집에 가서 읽을 책은 거기서 읽지 않고 고이고이 집에 들고 오는 거다.

그 당시의 내가 꿈꿨던 낙원은 이런 거였다. 4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이 있고, 아래쪽에는 밥을 넣어주는 좁은 틈이 있는 거다.(이건 뭐 감옥도 아니고ㄱ-) 누군가가 나를 위해 삼시세끼 밥을 넣어주면 나는 그 방 안에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실컷 원 없이 읽는 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생각의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방에 있는 책을 다 읽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뭐, 기왕 밥도 넣어 주는 거 책도 넣어 달라고 하지.


 현실적으로, 화장실도 가야하고 채광도 필요하고 일단 그만한 책을 확보하는데는 돈이 들고...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고등학생 무렵에는 진짜로 낙원 비슷한 곳이 있었다. 학교의 도서실이 무려 장서 2만권을 자랑하는 훌륭한 규모였던 것이다.  도서실은 야자실의 바로 옆에 있었다. 장서 2만 권 중에 1만 권 정도는 옛날 책이라서 실제로 읽기 보다는 자료 보관 용도였지만 나머지 1만권도 어차피 다 읽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했다. 이건 금전적인 문제까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는가!

 나는 도서반도 아니었는데 도서관에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드나들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도서반의 대학 도서관 견학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를 사서 선생님께서 데려가는 정도. -_-;

 고3때는 도서실에서 책을 왕창 빌려다가, 야자실 책꽂이에 꽂아놓고 공부하기 싫어지면 읽고 그랬다. 고3때가 아마 제일 책을 많이 읽었을거다. 못해도 일주일에 두 권씩은 꼬박꼬박 읽었다. 정말로 이건 낙원 비슷할뻔했다. 다만 이놈의 낙원은 3년이 지나니까 더는 내 낙원이 아니었다.


 대학 도서관은 10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거대 규모다. 뭐 가보면 실제로는 영어책 불어책 일어책 등등 포함이라 내가 읽을 수 있는 책만 따지면 100만권은 안되겠지만 고등학교 도서실 같은 거랑 규모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도서관은 낙원이 되기엔... 너무 멀었다. 덕분에 정작 대학와서는 한참 책을 멀리했다. 게다가 도서관을 이용해 버릇해서 책을 사는 버릇도 없었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애인님과 연애하기 시작한 뒤다. 사실, 웃기지만 애인님에게 홀딱 넘어간 것은, 애인님이 자기 집에 책이 3000권이나 있다고 해서였다. (그렇지만 진상은...ㅋㅋㅋ) 지금 다시 생각해도 웃긴다. 애인님은 심심하면 서점에 가서 책을 사 오는 사람이었고, 가방에는 늘 책이 한 권씩은 꼭꼭 들어있었다. (요즘은 애인님도 밑천을 드러내고 있다. 연애하더니 책을 잘 안 읽는다. 왜 안 읽어!) 덕분에 다시 부활한 독서 취미. 거기다가 이제 고등학교 때의 용돈과는 규모가 다른 용돈을 받고 있기에 자유롭게 책을 살 수 있는 형편도 되었다.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낙원에 있는 것 같다.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살 수 있는 돈도 있고, 밖에 나갈 필요도 없고, 그러면서 꼬박꼬박 삼시세끼 밥도 잘 먹고 있고... 거기다가 플러스 알파로 과거에는 읽기만 했던 책이지만 이제 그 내용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소중한 애인님도 있다. (내 애인님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그리고 진지한 청자다.) 그리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블로그도 있다. 게다가 없으면 곤란한 적당한 압박도 있다. (없으면 분명 책읽고 글쓰기보다 와우를 하고 있을 테니, 이 낙원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겠다. ㅋㅋ) 이 어찌 낙원이라 아니할쏘냐.


그러니 오늘 낙원을 느꼈다는 것을 나중에 돌아보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둔다. 나중에 보면 비웃을 지도 모르고, 혹은 그때가 좋았다고 추억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낙원을 느낀 이 기억은 소중한 기억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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