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from 문화생활/책 2008. 3. 3. 02:15


 애인님이 갑자기 매일매일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하라고 하라고 해서 기껏 한달에 한 개 정도 쓰는 게 다였던 애인님이 웬일일까요. 적응이 잘 안 됩니다. *-_-* 그렇지만 좋은 일입니다.

애인님 블로그의 새 포스팅에 대한 피드백 차, 생각난 김에 바리데기 감상이나 써볼까합니다.


바리데기 - 10점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황석영 작가님은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처음으로 황석영 작가님의 글을 본 것은 교과서에서였습니다. 그 유명한 《삼포 가는 길》. 솔직한 말로, 그 작품은 교과서에서 좀 뺐으면 좋겠습니다. -_- 왜냐하면 그 작품을 접한 저의 첫 인상이 '뭐냐 이 재미 없는 소설은' 이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고등학생이 고향에 대한 향수와,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 같은 거 알게 뭡니까? 이해도 안 되고 공감도 안 되고...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하시고 감동을 받은 분들 계시면 존경합니다. 저는 늦되어서 ....-_-;;;;)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도 기억도 못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황석영 작가님의 이름을 깊이 기억하게 된 것은 《장길산》에서였습니다. 10권의 대하 역사 소설인 장길산은, 홍길동이나, 임꺽정 또는 수호지와 같은 반골들의 이야기입니다. 조선 시대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너무 심한 나머지 이를 참지 못하고 의적이 되는 이야기지요. 그 결과는 물론 조정과의 대립이구요.

 대부분의 - 제가 읽어본 - 의적 소설은 결말이 비슷합니다. 홍길동전처럼 배경이 아주 환타지이지 않은 경우에는 어쨌든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도적들 역시 자신들만의 환상 속에서 끝까지 살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높으신 나으리들이 우리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것이 잘 맞는 현실 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네 삶이 팍팍한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죠. 어떤 사람은 땅을 사랑해서 땅을 사고, 어떤 사람은 싸구려 골프 회원권을 두 장이나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수조원의 재산을 불법으로 물려 주는 현실 앞에서 법은 참 멉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을 대변하는 의적소설의 결말조차, 결국은 냉정하고 싸늘한 현실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렇지만 장길산은 달랐습니다. 장길산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민초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영원히 살아남는 영웅이 됩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풀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삼포 가는 길의 작가와 동일 인물인 것을 알고는 '으악'해 버렸던 거지요. 페이지상 교과서에 장편을 실을 수 없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장편 소설이 들어있는 국어책을 나눠주려면 새학기마다 국어책만 20권정도 줘야할 지도 모르겠군요.ㅋㅋㅋ)

 장길산의 감동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바리데기 출간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그 책은 무조건 사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

 바리데기는 환상과 현실, 설화와 소설을 섞어놓은 작품입니다. 어떻게 읽으면 이것은 환타지이기도 하고,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이도 합니다. 우리의 구전 설화이기도 하고, 21세기에 쓰여진 새로운 소설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은 결국 되풀이 됩니다. 우리가 과거의 고전을 읽는 것은 그 속에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전 설화 바리데기에서도,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살아있는 바리에게도 삶은 고단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고, 부모님을 혹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고난 길을 가야하는 운명이죠. 21세기의 바리의 고통은 설화 속 바리가 겪는 고통보다 상상할 수 있을만큼, 손에 잡힐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에 공감을 삽니다. 기근으로 인해 일가가 뿔뿔이 흩어져,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형제가 죽고, 사랑하는 할머니가 죽고, 마지막으로 남은 동무였던 칠성이마저 산불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나마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 조금 살만해 지는가 했더니 인신매매를 당하게 됩니다. 컨테이너 상자에 실려 영국으로 팔려가게 되는 것이죠. 컨테이너 상자 속에서의 시간들은 죽음과도 같은 시간입니다. 바리의 의식은 몸을 떠나버리죠. 영국에 도착하여 좋은 사람들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지만 남편과는 파키스탄의 내전으로 인해 헤어지게 되고, 사랑하는 아이마저 친구로 인해 잃게 됩니다. 한 인간이 하나만 겪어도 견딜 수 없을 고통을 수없이 감내하고 또 감내했던 바리는 드디어 폭발합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바리는 생명수를 얻으러 떠나지만, 구천에서 생명수를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수는 바리데기가 밥해먹고 빨래하던 그 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수라는 것이 우리 바로 곁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실 생명수라는 것은 현실의 어떤 물질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항상 내면으로부터 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이 실은 내면 -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 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 혹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 고통스러운 욕망과 좌절, 소외와 전쟁, 상처와 박해로부터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 바리가 가져온 생명수는 그런 것입니다.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의 고통, 힘겨운 현실의 부조리를 달래주는... 이 책 자체도 생명수였습니다.





 저는 구조적으로 심미적인 작품을 좋아합니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정말 동떨어진 것 같은 설화 속 세계와 21세기는 사실 같은 세계입니다.

 저는 문장이 아름다운 작품을 좋아합니다.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리듬감 있고 어딘가 친근하게 들리는 북한 사투리와, 질질 끌지 않는 간결하고 우아한 바리의 목소리는 아름답습니다.

 저는 저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이 작품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예쁜 책을 좋아합니다. 이 책의 표지는 굉장히 예쁩니다.

 결론 : 저는 이 책이 참 좋습니다. (추천)


 

 뱀팔 : ...근데, 정말 꾸준히 쓰면 글쓰는 실력이 늘기는 하는 겁니까? -_- 근데 저는 왜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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