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중학생이 되려던 겨울이었으니까, 1996년. 12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우리 집은, 아버지만 빼고는 꽤나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독실한 신자이고, 저희 어머니는 교회 성가대이셨지요.
덕분에 저랑 동생은 모태신앙인이고 어릴 적에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는 매년 겨울 무렵에 무슨 대회를 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찬송 대회, 성경 고사, 성경 퀴즈, 성경 암송 등등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예선을 치르고, 지역 노회에서 본선을 치르고,
결선은 전국의 모든 노회에서 본선을 통과한 사람이 모여서 치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는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여기 저기 열심히 나가 보았지요.
하지만 노래는 못하므로 찬송 대회는 나가면 늘 즐. (교회 내의 예선에서 일단 실패)
1학년 때부터 줄곧 나갔던 대회는 성경 암송대회였습니다.
독실하신 저희 외할머니가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저를 붙들고 암송을 시키시곤 하셨고,
할머니 본인도 성경 암송을 잘 하시고 해서
저는 할머니에게 이끌려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만, 성경 암송은 정말 괴로웠습니다. ㄱ-
당연히 성적도 변변찮았죠. (예선을 통과해도 본선에서 성적이 빌빌)
6학년 때가 되어서, 지금까지 줄곧 해왔던 성경 암송 대신 처음으로 성경 고사로 종목 변경을 했습니다.
성경 고사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성경 책의 내용을 일부 범위를 정해 주고 공부해서 시험을 보는 거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저 말고도 5명의 학생이 성경 고사 반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저와 동갑인 남학생 둘과 여학생 하나, 한살 아래인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들이 평일 저녁에 모여서 선생님의 지도 하에 공부를 하는 거죠.
아 그런데 이게 저에게 의외로 잘 맞았던 겁니다.
토씨하나 안 틀리고 외우는 것보다 공부해서 시험치는 게 더 쉽잖아요. -_-?;;;
그 때 저는 그 고사반에서 왠지 저에게 다정하게 잘 대해주던 남학생A에게 호감이 있었습니다.
실은 저는 그 무렵에 학교에서 왕따였거든요 ㄱ-
여자애들에게 구박을 받는다기보다는 - 오히려 놀아주는 여자 친구들은 있었음 -
남자애 하나와 그의 친구들이 저를 괴롭히는 형세였는데
덕분에 저는 '남자애가 나에게 잘 해준다' 하나만으로도 혹하고 말았습니다.
(실은 지금도 다정한 남자 - 지구상에서 제일 다정한 내 애인님 - 에게 몹시 약합니다. :$)
당시의 저는 소박한 호감의 표현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오는 간식 타임 - 교회 앞 슈퍼에서 과자 골라오는 - 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 실은 싫어하는 편에 가까운 - 치토스를 사서 따조를 모으던 그 애에게 주곤 하였습니다.
당시의 우리 지역 노회 대회였던 경인 노회 대회가 마침 우리 교회에서 열렸는데,
분야를 바꾼 것이 주효했는지 저는 글쎄 지역 대회 1등을 하고 만 것입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에서 1,2,3,5등을 해먹었기 때문이죠. ㄱ-
아무튼 성과가 좋았기 때문에 선생님은 당시의 매우 효과적인 아이템 피자를 사주기로 하였습니다.
저녁으로 피자를 먹는데, 미묘한 자리 배치에서 제 옆에 앉으려던 한살 어린 남자애를 밀어내고 남학생 A가 제 옆에 앉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가슴이 두근두근 했겠습니까?
피자를 먹고 집에 가려고 하자, 국민학생에게는 꽤나 늦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 말고 다른 여자애는 집이 피자집 바로 근처인 아파트였고
저는 피자집에서 국민학생의 걸음으로 10분이 조금 넘는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누가 XX이(저) 좀 데려다 줄래?'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남학생A가 자원을 한 것입니다!!!
우와 *-_-*
그래서 남학생A와 저는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집 앞 전봇대 앞에서 저는 넌시지 물어보았습니다. 사람이 눈치라는 게 있잖아요.
"너, 좋아하는 애 있어? *-_-*"
그러자 남학생A는 잠시 망설이는 척을 하더니, 몹시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좋아하는 애는 없고, 호감 가는 애는 있어."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몹시 정치적인 놈이었습니다. -_-
그렇지만 저는 그때도, 다른 방면으로는 몹시 어두운 주제에 이쪽 방면으로는 눈치가 100단이었습니다.
"누군데?"
다시 남학생 A는 망설이는 척을 했습니다.
"너야."
(ノ*▽)ノ♡
거짓말 안하고 진짜로 집에 들어가서 엄마에게 막 자랑을 하고 냉장고 앞에서 방방 뛰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아 그때 정말 좋아서 방방 뛰었다'라고 기억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ㄱ-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지가 물어봐서 호감 좀 있다는데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 좋아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유치합니다만...
아무튼 이제 결선에 해당하는 전국 대회를 준비해야하게 되었고, 다시 모여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고사를 하던 애들에게는 은근히 비밀로 하게 되었지요.
남학생A는 고사가 끝나면 저를 매일매일 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나름 데이트였던 것이지요! 하하하.
(그러고 보면 저는 또 집에 데려다 주는 남정네에게 몹시 약합니다... 사람은 첫 연애를 답습하는 경향이 있나봐요.)
좋은 시간은 지나고 전국 대회에 갔는데 뭐 전국대회에서는 그냥 빌빌했습니다.
저는 장려상을 받아왔고 우리 교회에서 나간 다른 애들은 별 실적이 없었어요. (고사 부분에서는...)
그래서 정기적인 데이트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가끔 학교에서 만날 때는 있었는데 비밀주의였기 때문에 -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라서 사실 뭐 비밀로 할 것도 없고 -
남모르게 멀찍이 떨어져서 집에 같이 오고 한 적이 한 두번 있네요.
해가 가고 연말 무렵이었는지, 연초 무렵이었는지 중등부 예배 시간에 앞에 나와서 노래를 하라는 시간이 있었어요.
(거의 레크리에이션 시간이었나... 기억이 까물까물)
그 때 그 애가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대가 나와 결혼을 해준다면- 나는 그대의 노예가 되어도 좋아" 라는 가사.
당시의 저는 TV라고는 동생에게 주어진 1시간과 저에게 주어진 1시간을 합쳐서
5시부터 7시까지 - 만화영화 시간대 - 에 올인하고 있었던 지라
가수는 커녕 뉴스도 모르던 애였습니다.
덕분에 누구의 무슨 노래인지 전혀 몰랐죠
당연히 그날 처음 들은 노래고.
그렇지만 저는 그 애가 저를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제목도 모르고 가사도 딱 저 두 소절만 밖에 기억 못하고, 멜로디만 어렴풋이 아는 노래를 12년이나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학에 와서 노래방에 갔을 때 넌지시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죠.
이러이러한 노래가 있는데 혹시 아냐고.
그랬더니 박진영의 청혼가라고 하더군요.
오오 그렇구나.
그래서 다음에 노래방에 갔을 때 몰래 청혼가를 신청해 보았죠.
그런데 전혀 다른 음악이 나왔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무엇을 잘못해서 틀렸을까?
'아 내가 생각한게 아니네'라고 얼버무리고 넘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는 없는건가 보다, 하고 조금 실망했습니다.
유명한 노래가 아닐 수도 있는 거고,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노래방에는 없을 수도 있는 거고,
10년 된 기억 속의 노래.
기억이 부정확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또 몇 년 간은 아릿하게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로 찾아볼 생각도 별로 못했죠.
생각나면 보통 자기 직전이라던지, 밖이라서 검색을 못한다던지 그런 경우고
(실은 노래방에 가서나 기억났다거나;;)
한 번 노래방에서 못 찾았던 기억을 하니 찾아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문득 또 기억이 났습니다. (뭘 검색하고 있었길래)
요 근래에 아이돌 가수들을 막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네이X에서 노래 찾아 듣는 것에도 꽤나 익숙해져 있었구요.
그래서 처음으로 네이X 검색을 시도했습니다.
> 네이X님은 위대하십니다 ;ㅁ;! <
링크 삭제되서 유튜브 링크합니다.
찾았습니다! 12년 만에. 아릿한 초딩때의 기억에 의존해서...
살짝 웃고 있습니다, 지금.
그놈은 그냥 호감이라고 했지만 저는 많이 좋아했어요.
저에게 잘해준 남자애는 처음이었거든요.
저를 좋아했던 사람도 처음이었죠.
그 애가 정말 저를 염두에 두고 부른 노래이건 아니건 저는 그때 많이 설레었거든요. 하하하.
그 뒤로 그 애네 집에도 한 번 놀러간 적도 있고 그랬지만
어느 날 그 애가 '엄마가 중학교 올라가니까 공부에 방해된다고 연애하지 말래'라는 전화를 해와서
그만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훗.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싸이같은데에 걸어두면 다들 오해하겠죠? 젠장. ㄱ-
그나저나 안무는 지금 처음 보는 건데 정말 곡이랑 안어울리는군요 oTL.
첫 사랑도 아니고 꼬꼬마시절 첫 연애 이야기였습니다. 으하하하.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리플 좀... (안 재밌게 보셨더라도) 시방 무지 부끄러워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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