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약속이 있었는데 펑크가 났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시간이 생겼으니 밀린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하염없이 자는 일이었다.

 일어나서 빨래 돌리(라고 시키)고 잠들고, 빨래 널(라고 시키)고 잠들고. 빨래 제대로 널어졌는지 확인하고 또 잠들고. 대략 그간 누적된 피로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런대로 정신이 돌아온 시점이 오후 2시였다. 전날에 잠든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는데. 그렇게 자고도 자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어난 건 단지 더 자면 밤에 못 잘 것 같아서일뿐.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막상 손에 잡히는 일은 없고 또 그렇게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서 그냥 멍하니 하루를 흘렸다. 지난 번에 산 앨리스 조금 읽고, ... 또 뭘 했더라. 정말 멍하니 보내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사실 그간 백수였으면서도 이렇게 멍하니 보낸 날은 거의 없었다. 와우에 접속하면 항상 할 일이 많이 있었고 다 기억하지 못해 Todo 리스트까지 만들어가면서 했었으니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 그런 감정이 다시 잠을 불렀다.

 새벽 1시가 되어 다시 저녁잠을 청했는데 예상외로 또 잠이 아주 신나게 잘 왔다.

 오늘 아침은 어딘가 멍하고 힘들고 졸립긴 했지만 그래도 모닝커피 한 잔 보태어 간신히 '간만에 피곤하거나 졸리지는 않은' (그러나 멍한) 상태에 도달했다. 어쩐지 부주의하고 잃어버리고 잘 판단이 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간만에 무기력과 피로감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컨디션이 좋은 느낌.

 좋으면 뭘하나. 그날이라 배는 아프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부터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발가락 때문에 오전 시간은 정형외과에서 온종일 보냈다. 아마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을텐데 병원에 가게 돼서 어찌보면 다행이랄까.

 발가락은 그냥 어제 저녁부터 아무 이유없이 갑자기 왼쪽 새끼발가락이 통통 붓고 구부리거나 펼 때, 땅을 딛을 때 심한 통증이 느껴지길래 자고 일어나면 낫겠지 하고 뒀는데, 아침까지 그대로길래 병원에 갔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꼭 병원에 가야하나? 또 의사가 쳐다보기 직전에 나으려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꾸준히(?) 아파주었다. 대략 어디 부딪힌 적도 없이 지혼자 아프기 시작한 이 발가락에 도대체 무슨 병명이 내려지려나 궁금했는데 의사는 의외로 간단하게 답을 내놓았다.

 방사선 촬영 결과 부러진 곳도 없고 약간의 붓기만 있고 사실 의사는 붉어졌다 했지만 내눈엔 그냥 원래 내 발가락 색이었던 내 발가락은 압박에 의해 관절에 있는 막에 염증이 생겼다 하였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혹시 꼭 조이는 신발을 신었냐고 물었는데, 몇 주만에 처음으로 외출없이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한 날이 어제였다...=_=; 그래서 그건 아니라고 하였더니 꽉 죄는 신발과 양반다리(...)를 피하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피하라며 소염제를 3일치 처방해 주었다.

 양반다리라 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제 찬 거실바닥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앨리스를 열심히 읽었던 기억. -_-;;; 어쩐지 이유없이 발가락이 아플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양반다리의 양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정형외과 의사라 그런가 어찌알고 젊은 처자에게 양반다리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일까? 어쩐지 병원에 사람이 많더라니 명의였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니 신기하다. -.- 그 의사는 범인이 양반다리인 것을 도대체 어찌 알았을까....

 오전 한나절을 병원에서 다 보냈는데도 오후를 회사에서 보낸 것만으로도 정신이 멍하고 힘들었다. 퇴근이 임박했는데 하던 일에 시간이 모자라 - 아 물론 그것은 4시까지 다 설치를 해놓겠다고 하고서 5시 30분에야 해놓은 자들의 책임이 크다 - 그만 1시간 야근을 하고 말았다. 기왕 퇴근시간 넘길꺼 밥먹고 와서 했으면 좋았는데 나의 사수(?)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업무 넘겨주시는 분이 기어이 해놓고 저녁 먹지 않고 퇴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온몸에서 발산하고 계셔서 하는 수 없이 버티었다.

 어쨌거나 매뉴얼을 보면서 꾸역꾸역 멍청하게 같다붙이기 바쁜 프로그램 설치 작업은 끝나고 ...

 집에 오다보니 완전 소중한 소염제가 없는 거다. 집에 거의 다 왔는데! 7시 넘어서 퇴근하다보니 배가 고파서 눈에 뵈는 것은 없고! 애인님이 KFC가 먹고 싶다고 하였지만 KFC는 집 근처에 없고 제일 가까운 곳이 서현역에 있는데 서현역 KFC는 대략 이상하게 맛이 없다. 내가 '대략 이상하게 맛이 없'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음식은 재료나 위생이나 신선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난 그런 기분이 드는 가게는 엔간하면 가지 않는다. KFC는 싫고 배는 고픈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애인님이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홈플러스 지하식당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물론 딱히 거기의 무언가가 먹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빠르게 해결되고 종류가 다양하니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모범답안이었다.

 그런데 홈플러스 주차타워에 주차하고 내려오던 내 눈에 뜨인 것이 있었으니... '파파이스 광고판!' ...

 강서보건소 앞 파파이스가 망한 이후로 구경을 못한 바로 그 파파이스... 모든 메뉴 중에 맛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감자튀김 밖에 없었던 바로 그 파파이스가..!!!!!! 도대체 어디있다는 것인가! 정말 매의 눈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니... 홈플러스 밖 구석탱이에 파파이스가 박혀있었다. 이사온 지가 벌써 한참인데... 맥도날드라던지 버거킹이라던지 KFC에 대한 탐색은 마쳤지만 설마 서울에서도 찾기 힘든 파파이스 매장이 바로 집근처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해서 아예 찾을 생각을 안했더니....

 역시나 파파이스의 닭은 맛이 없었고 감자튀김은 여전히 중독적으로 맛이 있었으며 비스킷을 꼭 먹어야 한다고 떼쓴 애인님 덕분에 파파이스 비스킷이 매우 맛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발견하였다. 먹다보니 대부분의 주문 손님은 추가로 비스킷 n개를 주문하더라. 파파이스는... 선택메뉴(만)가 쓸만한 가게였던가. 어쨌거나 KFC는 멀고 '이상하게' 맛이 없으니 앞으로 이 파파이스를 자주 애용하게 될 듯. 

 그리고 이 글을 쓰다가 발견했는데 난 '기름진 음식'을 피해야만 했었다..... 엌.

 밥을 먹고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회사로 되돌아가서 책상에 얌전히 놓여있던 약을 찾아가지고 회사에서 챙겨 먹기까지 하고(...) 나왔다. 버스로 갔다 온다면 왕복 1.5시간이라 그냥 포기했을 텐데 차가 있다보니 드라이브 겸 야간운전 연습 겸 룰루랄라 다녀왔다. 역시 차가 확 줄어들어 (평소에도 많지 않지만) 차선도 막 대충 바꾸고 아주 편하게 집으로 왔다. 차가 있어서 나가는 기름값 주차비 등등을 다 고려해도 역시 차가 있어서 절약되는 시간과 체력이 훨씬 비싼 기분이다.

 집에 오니 다시 멍한 가운데 그래도 일기라도 쓰는게 그나마 한점이라도 쓸모 있을 것 같아 일기를 쓰는 중.

 몸에 카페인이 누적되면서 계속 피로한 것 같은 증상... 예전엔 방학 때 12시간 씩 자며 해소했었는데 이젠 방학도 없고 어떻게 되려나. 몸이 적응을 해 내려나?

 그간 회사에서 퇴근해서 새벽 3시까지 와우를 하고 자던 애인님은 도대체... 그는 철인이었나 =_=  졸지에 출퇴근에 전용기사가 생긴 데다가 와우를 끊어서 수면시간이 대박 늘어난 애인님은 매일매일 아침밥을 차리는 정성을 발휘하고 있다. 아... 철인 맞나보다. 지금은 옆에서 결혼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난... 피곤해서 될대로 되라의 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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