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

from 일상/일기 2011. 3. 28. 18:13

 워낙 뭐든지 잘 빠져드는 성격이라 지금까지 많은 것에 중독되고 또 극복해 왔지만 그것만큼은 헤어나질 못했었다. 지금도 솔직히 내가 완전히 끊을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든다. 그렇지만 이제 그 세계를 떠날 때다. 이 결심이 약해질 때쯤 읽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5년이나 해온 만큼 어찌보면 내 인생에서 한 자리 크게 차지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는데도 많이 부끄러웠다. 그 때문에 어찌보면 많은 추억들, 느끼고 배운 것들을 글로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사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게 별 거 아닌데 왜 나 자신의 선택과 결과를 당당하게 마주하지 못했을까.

 

 길드를 옮기면서 사실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불안했다. 당시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길드 시스템 나쁘지 않다. 단지 내가 모든 것을 너무 올인했을 뿐이다. 길드에 투자한 시간들 때문에, 길드를 떠날 일이 생길까봐 제대로 불만을 말하지 못한 채 쌓아온 시간들이 야기한 결과가 이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혼네를 가지게 된 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섬이라 떠날 수가 없어서란다. 알 것 같다. 난 그저 트러블 없이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대로 계속 견디기엔 너무 지쳤다.

 기본 일정만 소화해도 주말이 남아나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일정이 줄어들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기본 일정이 정시에 끝난 적이 아예 없다. 연장은 기본이고 걸핏하면 추가일정까지 생기고.

 한 두명이 실수할 때마다 국민학교 단체기압마냥 다같이 야단치는 공장. 그는 늘 모든 레이드를 쉬운 것이라고 평가하며 매번 공대를 다그쳤다. 이 쉬운 것을 왜 못 해. 글쎄 왜 못할까. 더 나은 택틱을 제시하면 일단 해보고 바꾸자 하고, 일단 해보느라 한두 시간 보내고 일정 끝날 무렵이 되면 이미 시간이 늦어서 바꿀 수가 없게 되고. 네임드를 쓰러뜨리는 것이 성취감을 주기 보다는 피곤함만 줬다. 훨씬 복잡하고 재미있어진 보스들. 영던까지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정작 레이드에선 재미가 없었다.

 원칙과 룰의 부재. 지각, 불참, 템 획득에 관해서 명시된 룰이 없어 다들 주먹구구로 매번 상황판단을 위해 관리자를 찾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아무런 감시도 없어 누군가는 템을 먹고 댓가를 내고 누군가는 내지 않고. 누군가는 드문드문 참석하며 아이템은 동일한 권한으로 굴리고.

 신입에 대한 룰도 없어 그저 헤딩네임드에 실컷 투입하다가 안되면 막판에 뺀다거나, 아니면 왜 안되냐는 식의 야단을 들어가며 트라이에 참가하는 기존 공대원이 의욕을 잃거나. 전 주에 잡았다곤 해도 경험없는 공대원 잔뜩 투입해놓고 왜 지난 주만큼의 퀄리티가 나오지 않느냐고 다그치면 도대체 어찌해야하지. 형평성도 효율성도, 아무것도 고려되지않은 투입때문에 진도가 후진하면 남는 건 공장의 분노 뿐이고.

 초반엔 열심히 대책을 생각해보곤 했지만 대체로 공장의 벽에 막혀 나중에는 그냥 포기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지난 오년에 대한 상실감, 남겨둔 것들에 대한 미련, 그리고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 이 모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내가 바라왔던 소박한 인생을 - 비록 현실은 아니었지만 - 누리게 해 주었고,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들을 경험하게 해 주었던 어떤 것을 이런 식으로 끝내게 되어 서글프다.

 슬프고 아쉽다. 곱게 키워온 아이들이 아쉽다. 그렇지만 사실, 그 아이들마저도 짐이 되고 있었다. 이미 나는 그곳에서 너무 많은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말라버린 서버, 돌아오지 않는 친구들, 즐겁지 못한 레이드, 짐이 되어버린 아이들. 이젠 정말 내려놔야지.


덧. 아이폰 메모장에 쓰고 옮겼는데... 아무래도 옮기는 과정에서 필터링(?)을 너무 많이 거치다보니 이 글이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약간 의문이 든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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